XRP 렛저 표준(Standards) 저장소에 새로 올라온 제안이 다중서명(멀티시그) 거래가 네트워크에서 조율되는 방식을 전면 손보려 하고 있다. XRPL에 내장된 멀티시그 기능과 기관 커스터디언들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업무 흐름 사이에 오랫동안 벌어져 있던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다.
'온체인 코사이너(On-Chain Cosigner)'라는 이름의 이 제안은 숀 시에, 즈위안 왕, 첸나 케샤바 B S, 마유카 바다리가 공동 작성했다. 제안이 통과되면 서명자들이 외부 조율 채널이나 최종 거래를 취합하는 중앙화된 담당자 없이도, 렛저 위에서 직접 다중서명 승인을 모으고 검증할 수 있게 된다.
제안이 겨냥한 '라스트 마일' 문제
XRPL은 수년 전부터 다중서명 계정을 지원해왔지만, 그 과정은 늘 오프체인 조율을 필요로 했다. 거래를 만든 뒤 이메일 같은 별도 채널을 통해 각 서명 권한자에게 일일이 전달하고, 서명받아 다시 돌려받는 식이다. 이 과정을 조율하는 사람이 모아둔 서명을 분실하거나 거래가 마무리되기 전에 자리를 비우면 전체 서명 작업이 실패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안 작성자들은 이를 기업용 커스터디 체계에서 나타나는 '라스트 마일' 문제라고 표현했다.
온체인 코사이너는 어떻게 작동하나
이 제안에 따르면 참여자는 렛저 위에 거래 페이로드의 불변 사본을 담은 TransactionProposal 객체를 직접 생성한다. 이후 각 서명자의 승인은 제출 시점에 검증되어, 오프체인에서 따로 모으고 확인하는 대신 해당 제안에 연결된, 위변조가 불가능한 서명 목록에 계속 덧붙여진다. 필요한 승인 수가 채워지면 누구든 완성된 거래를 복사해 렛저의 표준 거래 절차를 통해 제출할 수 있다.
이런 설계는 배치(Batch) 거래(XLS-56)나 스폰서드 수수료·예치금 등 기업 활용을 겨냥한 XRPL의 다른 기능들과도 맞물려, 대량 거래나 수수료에 민감한 업무를 처리하는 기관들의 마찰을 줄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기관 커스터디 확대라는 큰 그림의 일부
이번 제안은 XRPL이 기관 커스터디용 인프라로 자리매김해가는 더 큰 흐름 속에서 나왔다. 리플은 2026년 내내 시큐로시스, 피그먼트 같은 업체들과의 제휴를 통해 커스터디 인프라를 구축해왔고, 2025년 12월에는 통화감독청(OCC)이 리플 내셔널 트러스트 뱅크를 조건부로 승인했다. 이 은행은 리플의 스테이블코인 RLUSD를 뒷받침하는 준비금을 보관하고 기관 고객 대상 디지털 자산 커스터디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XRP 보유자 입장에서 짚어둘 만한 구분점도 언급한다. 은행들은 XRP를 직접 사거나 보유하지 않고도 결제·토큰화 파일럿에 XRP 렛저의 인프라만 활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런 렛저 단위의 업그레이드는 XRP 토큰 자체에 대한 직접 수요를 끌어올리기보다는, 네트워크의 기업용 배관을 개선하는 데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뜻이다.
이 제안이 채택되면 그 배관 안에서도 가장 수작업이 많고 오류가 나기 쉬운 단계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다. 리테일 XRP 보유자보다는 커스터디언과 기업 통합 담당자들에게 더 와닿을 변화겠지만, 파일럿 단계를 넘어 실제 상용 수준의 기관 활용으로 나아가려는 렛저의 큰 방향성과는 맞아떨어진다.